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문단 편집) === 시작 === || [[파일:attachment/troops_detail1.jpg|width=100%]] || || [[파일:attachment/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mem.jpg|width=100%]] || > "우리는 군 병력을 파견하는 것이 중대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아프가니스탄|당신 나라]]의 상황은 '''좋아지지 않고 반대로 더 악화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는 외부세력뿐만 아니라 [[무자헤딘|당신 나라 사람들 대다수]]를 상대로 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국민들은 절대 이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장관회의]] 의장이 1979년 3월 29일 회담에서 타라키 당시 아프간 대통령의 파병 요청에 대해 한 답변. [[http://www.stoletie.ru/territoriya_istorii/mogli_li_my_pobedit_v_afgane_2011-01-11.htm|#]] 세간에는 마치 소련이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아프가니스탄에 침공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당초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소련군 개입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을 서방에 넘겨줄 수 없다는 KGB의 강력한 주장으로 1978년까지는 아직 구체적인 군사개입은 여러 옵션들 중 하나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에서 소련의 개입에 결정적인 구실을 주는 사건이 터진다. 그것은 1979년 3월의 헤라트 반란으로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명령을 받고 반정부시위 진압에 투입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육군 17사단 병력들이 이스마일 칸 대위의 선동으로 오히려 반정부군 세력에 가세해 버린 사건으로, 이 사건에서 소련 군사고문 1명과 민간인 소련인 2명을 죽이고 시체를 막대기에 꽂아서 거리에 전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파일:attachment/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spestnaz.jpg|width=100%]] || || [[VDV|공수군]] [[스페츠나츠]] || 당연히 이는 소련을 분노하게 했고 소련의 개입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합리적으로 본다면 당연히 살인범 체포 및 처벌을 요구하고, 못한다 싶으면 직접 자기들이 잡아들일 테니 협조해 달라고 하는 게 정답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소련은 결정적인 오판을 내렸는데, 아민 정권을 제거하고 카르말 정권을 세우는 한편 적극 개입하여 아프간 전역을 확실하게 갈아엎는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아민 정권이 제대로 통치를 못하니까 갈아버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인데, 소련 주도하에 이루어진 동유럽 정권교체가 적어도 초기에는 현지 공산세력의 도움과 [[나치 독일]]과 무능한 기존 정부에 학을 뗀 나머지 누구라도 상관없다고 여긴 현지 국민들의 암묵적 동의로 가능했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아프간 또한 무난하게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오판한것. 어쨌건 197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새벽 소련군 제40군은 아프간 접경 테르메즈 인근의 아무다리야 강에 부교를 설치하고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본격적인 침공 시작 전인 12월 7일에 이미 민간인으로 위장한 KGB 예하 스페츠나츠 대원 700명과 친소파 인사인 바브라크 카르말을 전부 입국시켜 놓았다. 초기에는 이 스페츠나츠 대원들을 이용하여 아민 대통령 관저의 식사에 [[독살|독을 타는]] 방법으로 아프간 지도부를 혼란시키려 했으나 미리 식사를 먹어보는 시식자들 때문에 실패했고, 저격 또한 오발로 실패하였다. 결국 소련군의 본격적인 침공에 맞춰 관저를 전면공격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당일날 아프간군 지휘관들을 초청하여 모아두는 등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두고 1979년 12월 27일 작전개시와 동시에 아프간군 지휘관은 모조리 체포, 대통령궁은 스페츠나츠들이 습격했다. 당시 대통령궁을 지키고 있던 아프간 대통령 호위대 200여 명은 모조리 사살당했고, 아민 대통령도 스페츠나츠에 의해, 과거 인민민주당이 다우드 칸 일가를 몰살한 것처럼 가족들과 함께 사살당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되었다. 지도해 줄 국가가 없다면 통제가 풀려난 무장단체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그래서 훗날 상임이사국인 중국, 영국, 미국, 러시아가 타 국가에 전쟁선포 하고 승리한 뒤 경제재재만 했으면 했지, 광신적인 ISIS를 제외하면 정권까지 박살내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미국이 [[무아마르 카다피]]와 [[사담 후세인]]을 몰아낸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지만, 사실 후세인은 그렇다 쳐도 카다피는 반군과 반군의 후원자 국가들이 처분하는 걸 방조한 것에 더 가깝다.] 뒤이어 소련-아프간 국경에서 전차와 장갑차들이 국경을 넘어오고[* 전차는 소련군 참모부의 '설마 저항세력들이 대전차 무기를 사용하겠냐'는 안일한 판단으로 고작 [[T-62]]가 투입되었으나 [[현실은 시궁창]]. 이는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 게릴라들이 미군을 상대로 대전차 무기를 적극 사용하는 등 이미 대전차 무기 체계가 광범위하게 확산된 점을 간과한 것이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속사정도 있는데, 소련은 일단 돈이 없어서 연료 퍼먹는 가스터빈 엔진을 쓰는 T-80은 투입할 예정조차 없었고 T-64는 신뢰성을 믿을 수가 없는 데다가 주요 공장이 우크라이나에 있어 수리 보수하기도 어려웠다. 남는 것은 T-72였는데 대부분 중소국경이나 유럽에 가 있었고, 결정적으로 T-55M과 T-62M은 각각 41.5톤과 42톤으로 44톤이 넘는 T-72B 계열보다 가볍고 크기도 조금 더 작아 산악지대인 아프간에서 쓰기 [[현실은 시궁창|'''적합할 것 같았다.''']]], 예정대로 지상으로 달려온 기갑부대와 보병들은 몇 개 안되는 아프간 도시들을 점령한 뒤 카르말 정부를 세우고 아민을 미국의 앞잡이로 격하시키면서 전쟁은 순식간에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